Opening
2019년 6월, 미국 행정부가 네덜란드 한 회사를 압박했습니다. ASML — 인류가 만드는 가장 작은 회로를 새기는 도구를 단독으로 만드는 회사. 압박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EUV 수출 허가를 갱신하지 마라."
그날부터 지금까지 7년 동안, ASML의 EUV는 단 한 대도 중국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7년의 차단이 만든 결과가 2026년의 풍경입니다 — 중국이 양산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반도체 회로는 약 90nm. ASML이 2003년에 도달한 수준. 약 22년의 격차.
이것이 반도체 산업의 한 단면입니다. 한 회사, 한 도구, 한 결정이 글로벌 산업 전체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가 ASML 하나가 아닙니다. 이번 letter는 반도체라는 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권력이 어디 모여 있는지, 한국이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를 한 장의 풍경으로 펼칩니다. 7회 연재의 첫 호입니다.
반도체 산업이라고 한 단어로 부르지만, 안에는 여섯 개의 다른 산업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섯 자리에 각각 다른 나라, 다른 회사가 깊게 자리잡고 있어서 — 칩 한 장이 만들어지려면 여섯 자리가 동시에 작동해야 합니다. 어느 한 자리만 멈춰도 칩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1
여섯 자리 — 칩 한 장이 만들어지는 길
휴대폰 안의 APAP(Application Processor,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 *에이피*) —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칩. Apple A18, Qualcomm Snapdragon, Samsung Exynos, MediaTek Dimensity 등이 대표적. CPU·GPU·NPU(신경망 처리 장치)를 한 칩에 묶은 SoC(System on Chip)., 데이터센터 서버 안의 NVIDIA H200, 자동차의 ECU — 모두 다른 칩이지만 만들어지는 길은 같은 여섯 단계를 거칩니다.
- 설계·EDA — 회로 도면을 그리고 검증하는 단계. 미국 세 회사(Synopsys·Cadence·Siemens EDA)가 EDA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전자설계자동화 — *이디에이*) — 칩 설계자가 회로를 그리고 시뮬레이션·검증하는 소프트웨어. Apple도, NVIDIA도, Samsung도 이 세 회사 소프트웨어 없이는 칩을 만들 수 없습니다. 2025년 6월 미국이 對중국 EDA 수출을 일시 중단했을 때, 중국 설계 산업이 즉시 마비된 적이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시장의 74%를 잡고 있습니다.
- 장비 — 회로를 실리콘에 새기는 도구. ASML(노광)·Tokyo Electron(코터/디벨로퍼)·Applied Materials·Lam Research·KLA(식각·증착·검사) 5개사 합산 70~75%. EUVEUV(Extreme Ultraviolet, 극자외선 — 파장 13.5nm) — 가장 작은 패턴을 새기는 노광 기술. 7nm 이하 첨단 칩 제조 필수. ASML 단독 공급. 한 대 가격 €350M(약 5,000억 원). 노광기는 ASML 한 회사가 100%.
- 소재 — 실리콘 웨이퍼, 포토레지스트(감광액), 공정 가스, CMP 슬러리. 일본 회사들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1~3위.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3사(JSR·TOK·Shin-Etsu)가 약 90%.
- 파운드리 — 설계 도면을 받아 칩을 실제로 만드는 공장. 대만 TSMC가 글로벌 67%, 3nm 이하 첨단 노드는 사실상 90% 이상 독점.
- 메모리 — 데이터를 저장하는 칩. 한국 두 회사(Samsung + SK하이닉스)가 DRAM 70%, HBM 79%, NAND 52%.
- 패키징 — 만들어진 칩들을 한 패키지에 묶는 단계. 최근까지 가장 후순위 영역이었지만, AI 가속기 시대에 TSMC CoWoSCoWoS(Chip-on-Wafer-on-Substrate, 코우오스) — TSMC가 2011~2012년 상용화한 2.5D 패키징. NVIDIA H100·H200·B200·AMD MI300X 등 거의 모든 AI 가속기가 이 한 가지 패키징을 통과해야 출하됩니다. 2023년 8월 NVIDIA 부사장: "GPU 부족 원인은 웨이퍼가 아니라 패키징."가 GPU 출하 자체의 병목이 됐습니다.
여섯 자리를 한 표로 정리하면 산업 권력의 지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 자리 | 1위 | 점유율 | 국적 |
|---|---|---|---|
| EDA | Synopsys + Cadence + Siemens 3사 | 74% | 🇺🇸 + 🇩🇪 |
| 장비 (EUV) | ASML | 100% | 🇳🇱 |
| 소재 (EUV 포토레지스트) | JSR + TOK + Shin-Etsu 3사 | ~90% | 🇯🇵 |
| 파운드리 (3nm 이하) | TSMC | 90%+ | 🇹🇼 |
| 메모리 (HBM) | SK hynix | 62% | 🇰🇷 |
| 패키징 (CoWoS) | TSMC | 사실상 단독 | 🇹🇼 |
이 표가 시사하는 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한 자리도 한 나라가 전부 가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EDA를, 네덜란드가 장비를, 일본이 소재를, 대만이 파운드리·패키징을, 한국이 메모리를 — 모두 한 자리씩 잡고 있습니다. 둘째, 각 자리는 한두 회사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EUV는 ASML 한 회사, 3nm 파운드리는 TSMC 한 회사,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3사. 즉 산업 전체가 약 10~15개 회사의 결정에 묶여 있습니다.
§2
1,070조 원의 산업, AI가 끌고 가는 곡선
2025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약 $7,956억 달러(약 1,070조 원) 규모입니다. WSTSWSTS(World Semiconductor Trade Statistics,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 — *더블유에스티에스*) — 1986년 설립. 글로벌 반도체 매출 공식 집계 기관. 분기마다 시장 규모를 발표합니다. 공식 집계 기준이고, 전년 대비 +26.2% 성장. 인류 산업 중 단일 카테고리로 이 규모와 이 성장률을 동시에 가진 산업은 거의 없습니다.
2년 전 풍경을 비교하면 차이가 더 극명합니다.
| 연도 | 매출 | YoY |
|---|---|---|
| 2023 | $5,260억 | -8.2% (메모리 침체) |
| 2024 | $6,274억 | +19.1% (AI 회복) |
| 2025 | $7,956억 | +26.2% |
2년 만에 매출이 1.5배가 됐습니다. 무엇이 이 곡선을 끌어올렸을까요. 4개 미국 회사의 한 가지 결정이 답입니다.
Amazon, Microsoft, Google, Meta — 이른바 ‘하이퍼스케일러’ 4사. 이들의 합산 CapEx(자본적 지출) 곡선이 반도체 산업의 매출 곡선과 동기화되어 있습니다.
- 2024: $251B
- 2025: ~$400B
- 2026 가이던스: ~$700B (+77%)
$700B. 한국 1년 정부예산이 약 600조 원(약 $430B)이니, 4개 미국 기업이 1년에 쓰는 CapEx가 한국 정부 1년 예산의 1.6배입니다. 그리고 그 돈의 약 60%가 칩으로 갑니다 — 약 $420B.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이 4개 회사의 결정에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곡선이 진짜인지, 거품인지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호에서 따로 다룹니다. 우선 풍경으로만 봅니다 — AI라는 한 가지 동력이 반도체 산업 전체를 끌어올리고 있고,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3
권력은 어떻게 모였는가 — 한 자리의 이야기
여섯 자리(segment) 안에서 가장 단단한 네 곳이 ASML EUV 100%, TSMC 3nm 90%+, TSMC CoWoS 사실상 단독, 일본 3사 EUV 포토레지스트 90%입니다. 이 네 자리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 후발주자가 따라잡는 데 짧으면 5년, 길면 15~20년의 격차가 필요합니다.
그 격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한 자리만 들여다보겠습니다. ASML EUV의 독점은 시장 경쟁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닙니다 — 1997년 미국 정부의 한 번의 결정에서 갈렸습니다.
그해 Intel·AMD·Motorola가 미국 에너지부(DOE)DOE(Department of Energy, 미국 에너지부) — 산하에 Sandia·Lawrence Berkeley·Lawrence Livermore 3대 국립연구소를 두고 있어, 사실상 미국의 첨단 과학기술 정책 본부. EUV 개발의 기초 연구가 이 세 연구소에서 시작됐습니다. 산하 3대 국립연구소(Sandia·Lawrence Berkeley·Lawrence Livermore)와 함께 EUV LLC 컨소시엄을 결성했습니다. 미국 납세자 돈과 기업 자금을 묶어 차세대 노광 기술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Intel은 글로벌 표준화를 위해 당시 노광기 세계 1·2위였던 Nikon·Canon — 일본 두 회사 — 도 컨소시엄에 가입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DOE와 미국 의회가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 "미국 납세자 자금으로 개발한 IP를 일본 경쟁사에 넘길 수 없다."
대신 1999년 ASML이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고 가입했습니다. ① 미국에 R&D 센터를 세울 것, ② 부품의 일정 비중을 미국산으로 쓸 것. 2001년 ASML이 미국 노광기 회사 SVG(Silicon Valley Group)를 인수하면서 EUV 핵심 IP 라이선스도 확보했습니다.
Nikon은 자체 개발을 계속했고 2008년에는 시제기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금이 끊겼고, 2012년 Intel이 ASML에 지분 투자를 단행하는 것을 보고 2011년 EUV 사업에서 정식 철수했습니다.
즉 2026년 현재 ASML이 EUV 100%를 점유하고 있는 풍경은, 1997년 미국 정부의 한 번의 결정 — "일본 회사는 받지 말자" — 이 25년 뒤에 만든 결과입니다. 산업 권력은 시장이 자연스럽게 만든 결과가 아닙니다. 한 번의 정책 결정, 한 번의 자금 끊김, 한 번의 인수가 25년 뒤의 풍경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25년 뒤의 풍경이 지금 또 다른 25년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 미국·네덜란드·일본 3국 동맹이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중국으로 가는 EUV·첨단 DUV·EUV용 코터/디벨로퍼·EUV 마스크 검사 장비를 모두 차단했습니다. 7단계 수출통제. 그 결과가 글 처음에서 본 풍경 — 중국의 양산 노드가 22년 격차로 묶여 있는 풍경입니다.
다른 다섯 자리(segment)에도 비슷한 ‘왜’가 한 줄씩 있습니다. 일본이 소재에서 강한 이유, TSMC가 대만에 묶여 있는 이유, SK하이닉스가 NVIDIA HBM의 90%를 잡은 이유. 그 ‘왜’들을 다음 호부터 한 자리씩 풀어갑니다.
§4
한국이 잡은 자리
여섯 자리(segment)의 풍경 안에서 한국이 잡은 곳은 한 자리입니다 — 메모리. 그러나 그 한 자리에서 한국은 압도적입니다.
| 메모리 종류 | 한국 점유 | 구성 |
|---|---|---|
| DRAM | 70.4% | SK하이닉스 36% + Samsung 34.4% |
| HBM | 79% | SK하이닉스 62% + Samsung 17% |
| NAND | 51.6% | Samsung 32.3% + SK Group 19.3% |
세 가지 모두 한국 두 회사 합산 50% 이상. DRAM과 HBM은 70% 이상입니다. 메모리에서 한국의 자리는 미국이 EDA에서, 네덜란드가 EUV에서, 대만이 파운드리에서 차지한 자리와 같은 종류 — 대체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중에서도 한 영역이 결정적입니다. HBM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 — *에이치비엠*) — DRAM 다이를 8~16층 수직으로 쌓아 만든 메모리. 일반 DRAM보다 대역폭이 약 5~10배 빠르고, GPU 옆에 직접 붙여 사용. AI 가속기 시대의 핵심 부품. SK하이닉스가 MR-MUF(Mass Reflow Molded Underfill, 매스 리플로우 몰디드 언더필)라는 독자 패키징 기술로 세계 1위 — NVIDIA H200·B200 HBM의 약 90%를 공급합니다.. DRAM 다이를 수직으로 12~16층 쌓아 GPU 옆에 붙이는 메모리. NVIDIA H100·H200·B200 GPU의 옆에 반드시 들어가는 부품입니다. SK하이닉스가 NVIDIA로 가는 HBM의 약 90%를 공급합니다.
이 사실의 의미를 한 줄로 풀면 이렇습니다 — NVIDIA가 1년에 출하하는 AI 가속기 곡선이 사실상 SK하이닉스의 HBM 생산 곡선과 동기화되어 있습니다. 한국 한 회사의 한 라인이 AI 시대 가장 중요한 부품의 흐름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리는 메모리에 묶여 있습니다. 다른 다섯 자리에서는 한국이 1등이 아닙니다.
- 파운드리: Samsung 6.8% vs TSMC 71% — 약 10배 격차
- 장비: 글로벌 5사 합산 70%+ 중 한국 없음
- 소재: 일본 의존도가 2018년 34.4%에서 2022년 24.9%로 줄었지만, EUV 포토레지스트는 여전히 95%(통관 물량 기준) 일본
- EDA: 미국 3사 74%, 한국 회사 없음
- 패키징: 메모리 패키징(SK하이닉스 MR-MUF)에서는 세계 1위. 그러나 시스템 칩 어드밴스드 패키징에서는 ASE(대만)·Amkor(한국계 모기업이지만 본사 미국) 대비 격차
한국이 잡은 자리는 단단합니다. 그러나 좁습니다. 메모리 한 자리에서 압도적이고, 나머지 다섯 자리에서는 외국의 권력에 매여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이 마주한 풍경입니다.
Closing
한 줄의 사슬이 아니라 그물
"공급망(supply chain)"이라는 단어를 자주 씁니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에서 이 단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한 줄의 사슬이 아니라 — 여섯 자리가 서로를 잡고 있는 그물(mesh)입니다.
NVIDIA H200 한 장이 만들어지려면 미국(설계·EDA·일부 장비), 대만(파운드리·패키징·NVSwitch), 한국(HBM 메모리), 일본(웨이퍼·포토레지스트·코터·ABF 기판), 네덜란드(EUV 노광기), 영국(Arm CPU IP), 독일(자이스 광학·Henkel 소재), 이스라엘(NVLink 네트워킹) — 여덟 나라의 손이 동시에 닿아야 합니다.
이 여덟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의 어느 한 회사가 멈추면 GPU 한 장도 출하되지 않습니다. ASML이 멈춰도, TSMC가 멈춰도, SK하이닉스가 멈춰도, Tokyo Electron이 멈춰도, Ibiden이 멈춰도 — 똑같습니다. 멈춤은 한 줄의 끝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물의 매듭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도체 산업의 풍경입니다. 어디서나 단단하고, 어디서나 깨질 수 있는 단단함.
다음 호부터는 이 여덟 나라의 그물을 한 매듭씩 풀어갑니다. 산업분석 #02 — GPU 한 장이 거치는 8개국에서 미국 설계실에서 시작해 대만 신주의 TSMC Fab 18을 거쳐 한국 이천 SK하이닉스로, 그리고 다시 대만 폭스콘으로 — 한 장의 칩이 사람의 손을 거치는 여정을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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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 기준 데이터를 사용했습니다.